▶▶ 김일수, 『사랑과 희망의 법』,교육과학사, 1994


카인의 굴레(pp.12~14)

인간이 타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범죄 중 가장 극악한 것이 살인이다. 살인은 타인의 생명을 빼앗기 때문이다. 생명은 각자에게 단 한번 주어진 고유한 가치앋. 이 생명은 재생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생명은 그 자체가 목적으로 실존하는 것이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지고한 생명의 값이 오늘날 땅에 떨어져 버렸다. 너무나 빈번한 살인범죄에 대해 보통사람들은 충격도 분노도 더 느낄 수 없을 만큼 길들여졌다. 왜 이같은 인명경시와 인간성 상실의 시대적 조류가 우리를 엄몰시키고 있는가?

생명자체의 존귀성과 가치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과 확신이 저급한 데서 먼저 그 원인을 살펴볼 수 있다. 원래 인간의 생명은 신체, 자유, 명예, 재산 등 어떤 가치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윤리적 인격의 주체로서 자유로운 발전을 지향하면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할 수 잇는 기본적인 토대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한다. 어느 의미에서 인간의 생명은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간의 생명도 목적을 위한 수단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치닫고 있다. 많은 전쟁의 경험이 인간의 생명을 그렇게 전락시키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증오사상이 인간의 생명을 이데올로기라는 우상밑에 깔아 버렸다. 경제적 건설과 풍족한 삶의 욕구가 인가조절정책이란 미명으로 생성 중에 있는 생명의 순들을 임신중절이란 통로를 통해 휩쓸고 지나갔다.

인간의 생명이 일시적 쾌락의 도구인 마약과 투기놀이의 희생물이 되어 버렸다. 극악한 범죄에 대한 응징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오류가능한 판결에 의해 국가는 법이란 이름으로 사형과 사형집행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우리가 진실로 인가다운 사회를 건설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이 지고한 인간 생명을 불가침, 불가폐의 권리로 승인하는 의식전환에서 출발해야 하리라고 본다.

그밖에 살인범죄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카인의 그림자를 밟고 있다. 미움과 분노, 시기와 탐욕이 인간의 생명을 세속적인 목적실현의 수단으로 삼고, 그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아간다.

물론 인간은 비사교적인 본성이 있기 때문에 남과 비교하고, 남이 나보다 앞설 때 선의의 경쟁으로 정정당당히 그 보다 앞서가는 행위규칙에 익숙하지 못하다. 때로는 시기하고 증오하며, 그리해서 헐뜯고 무시하다가 끝내는 타인의 생명을 멸절시키기에 이른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에 참여한 인간존재에 뿌리박고 있는 죄의 본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죄의 본성을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그럴 듯한 자기변명으로 위장하려 할 때 인간은 카인의 전철을 밟게 된다.

죄를 부끄러워하는 사회분위기가 절실하다. 그러자면 사회분위기의 주류만은 건강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한다. 무엇보다 생명을 사랑하는 사회적 연대의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한 극악한 범죄인의 생명도 생명이기에 아낄줄 아는 의식, 한 태아의 생명일지라도 생명의 신성함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아쉽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만 우리는 카인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다. 죄의 소원은 인간의 본성 속에 있으나 선을 행함으로 죄를 다스리게 될 때 비로소 살상범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으리라.
(크리스찬헤럴드 1991.12.10.)